은퇴한 남편과 24시간 함께하기, 숨 막히지 않는 거리두기
아는 교수분이 작년에 정년을 맞았다.
나보다 2살 위인 그 분은, 퇴직하던 날 후배들한테 술을 크게 샀다. 홀가분하다고. 이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겠다고 했다. 그게 작년 봄이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만났더니 분위기가 달랐다. 같이 술 한 잔 하다가, 이런 말을 꺼냈다.
"집에 있으니까, 눈치가 보여."
눈치가 보인다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무섭다는 것도 아니고, 싫다는 것도 아니고. 눈치가 보인다는 것.
나는 아직 출근을 한다
나는 2년이 남았다.
제 직업은,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여유는 있다. 다만, 결과는 만들어내야 하고, 책임은 져야 한다.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시간을 사용하는 개념이다. 교수라는 자리가 원래 그렇다.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롭고, 집에 있는 날도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집에서 놀지는 않고, 일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친구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나도 집에 있는 날, 소파에 앉아 있다가, 저 친구처럼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아니, 이미 조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연구실보다 집에 있는 날, 아내의 표정이 뭔가 다르다는 걸 나는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아내에게도 하루가 있다
친구한테 좀 더 들어봤다.
퇴직하고 나서, 처음엔 그냥 집에서 쉬었다고 한다. 오전에 늦게 일어나고, 아내가 차려준 밥 먹고, 소파에서 뉴스 보고, 점심 먹고, 또 뒹굴고. 딱히 잘못한 건 없었다. 그냥 쉰 것이다.
그런데, 아내 입장에서 보면 달랐다. 오랬동안, 혼자 꾸려온 하루가 있었다. 장을 보는 시간, 전화 통화를 길게 하는 시간,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오후. 그게 아내의 삶이었는데, 남편이 거기 불쑥 들어와서 종일 앉아 있는 것이다.
밥은 두 끼가 됐고, 청소는 더 자주 해야 했고, 뭔가 해드려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생겼다고 했다. 남편이 심심해 보이면 미안하고, 말을 걸면 하던 걸 멈춰야 하고.
이런게 쌓이면서, 아내가 친구를 어려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비슷한 신호를 받았다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강의가 없는 날이었다. 오전에 집에서 논문을 쓰다가, 심심해서 아내한테 말을 걸었다. "점심 뭐 먹을까?" 아내가 잠깐 머뭇하더니 "당신 오늘 학교 안 가?" 하고 되물었다.
그때는,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친구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 장면이 다시 생각났다. 그게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고.
오늘 있어요, 없어요. 그 물음 안에 꽤 많은 것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거리가 정을 만든다
우리 세대 사람들은, 가까이 있으면 가깝다고 착각한다.
학교에서도, 그게 느껴진다. 정년 후에도 강의를 나오는 선배 교수들, 집에 있기가 어색해서 갈 곳을 찾는 것이다. 학생들하고 지내는 것이 좋아서라고 표현하지만, 집에 종일 있으면 아내와 부딪힌다는 말을 넌지시 하는 분들도 있다.
함께 있다는 것이, 꼭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무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각자의 시간이 있고, 각자의 자리가 있고, 그러다 저녁에 식탁에서 만나는 것. 그게 오히려 더 오래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걸, 나는 친구를 보면서 배우고 있다.
친구는 요즘 오전에 혼자 나간다고 했다. 도서관에 가거나, 그냥 동네를 걷거나. 별다른 목적 없이 집을 비워주는 것이다. 그랬더니 아내 표정이 달라지더라고. 돌아오면 반겨주더라고.
2년이라는 시간
이 연구실을 반납하고 나면,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갈 곳 없이 집에만 있을 것인가. 아내의 하루 속으로 아무 준비 없이 들어갈 것인가.
그러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걸, 친구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느꼈다. 퇴직 후의 내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 연구실 말고 내 자리가 어디에 있을지. 아내 곁에 있되, 아내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지.
함께 오래 살고 싶다면, 함께 있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교수생활 오래했어도, 이건 아무도 안 가르쳐줬다.
친구는, 요즘 꽤 괜찮아 보인다.
지난주에 만났을 때, 아내와 동네 새 식당을 찾아다니는 게 소소한 취미가 됐다고 했다. 대단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그냥 서로한테 숨 쉴 틈을 줬을 뿐이다.
나도 조금씩 조금씩, 정년 후의 남편 노릇도 미리 연습해워야 할 것같다.
숨 막히지 않는 거리두기. 그건 멀어지는 기술이 아니라, 오래 곁에 있기 위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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