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능력에 대하여

이미지
  혼자서 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 그 사이를 오가는 작은 사람들. 그 풍경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람의 삶이란 것이, 별 것 아닌 듯하다. 저 사람들 중에 누가 뛰어나고 누가 못한 것인지, 여기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의 능력이란 게 그게 그것처럼 느껴진다. 잘나고 못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 그 모든 것이 같은 높이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위 공무원도, 의사도, 변호사도, 사장도, 이름 없는 사람도 다 거기서 거기다. 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내가 그토록 애쓰고 이루어 놓은 것들이,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은 순간. --- 그런데 막상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학자로 살아오면서, 나는 대단한 학자들을 여럿 보았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문제해결을 하는 사람. 보통 사람이라면 포기했을 자리에서 끝내 버텨낸 사람. 매일 새벽 2시까지 책을 보시던 분.  이런 사람들 앞에 서면, 인간의 능력이란 것이 결코 다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 사람의 능력이기도 하다. --- 그렇다면,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두 가지 생각이 모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둘 다 틀린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이것은 어디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질문 일지도 모른다. --- 다만, 살면서 하나 알게 된 것이 있다.  남과 비교하는 눈으로 바라볼 때, 능력은 언제나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을 때, 능력은 조금씩 자라는 것처럼 보인다. 남보다 뛰어난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아진 것 — 어쩌면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성장의 모습일 것이다. ---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

배우자의 코골이와 잠버릇, 수면의 질을 지키는 지혜

이미지
  밤이 깊어지면, 슬그머니 시작된다.  처음에는 작게, 그러다 리듬을 탄다. 커진다. 옆에 누운 사람의 코골이다. 결혼한 지 30년이 훨 넘었건만, 이 소리 앞에서는 여전히 잠이 달아난다. 밤새 뒤척이다, 어느새 새벽 2시가 되어 있다. --- 많은 부부가 이 문제를 겪는다.  그런데 묘하게도, 낮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간다. 코를 곤 당사자는 기억조차 못 하고, 뜬눈으로 밤을 보낸 쪽만 혼자 피로를 안고 아침을 맞는다. 이 어긋남이 쌓이다 보면, 별것 아닌 일에도 예민해지고, 말투가 퉁명스러워진다. 수면 부족이 부부 사이를 조금씩 갉아먹는 것이다. --- 나도 한때는, 이 문제를 그냥 참아야 하는 일로 여겼다. 부부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나 참는 것과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은 다르다.  솔직하게 말해서 병원을 가던지 다른 방에서 자던지, 어떤 개선방법을 찾는 것도 좋겠다.  --- 코골이는 단순한 잠버릇이 아닐 수 있다.  수면무호흡증이 동반되는 경우, 자는 동안 산소 공급이 불규칙해져 당사자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한다. 낮에 이유 없이 졸리거나,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다면 한 번쯤 이비인후과나 수면 클리닉을 찾아볼 만하다. 혼자 끙끙 앓기보다 의사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옆에서 잠을 설치는 배우자를 위해서도,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도. --- 취침 자세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달라질 수 있다.  등을 대고 누우면 혀가 뒤로 처지면서 기도가 좁아진다. 옆으로 돌아눕는 것만으로 코골이가 줄어드는 경우가 많다. 베개 높이를 조절하거나, 목과 어깨에 무리가 가지 않는 편안한 위치를 찾는 것도 도움이 된다. 술은 근육을 이완시켜 코골이를 악화시키므로, 저녁 음주는 가능하면 줄이는 것이 좋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쌓이면, 편안한 밤이 다가오리라 생각한다. --- 부부가 오래 함께 살다 보면, 서로의 잠버릇이 그 사람의 일부가 된다.  거슬리기도...

블로그 글을 장려하는 동영상이, 요즈음 유튜브에 많이 나오는 이유

이미지
  요즘 유튜브를 켜면, 블로그로 월 수백만 원을 번다는 영상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섬네일은 화려하고, 제목은 자극적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솔깃할 만하다. 나도, 그런 영상을 몇 편 보았다. 그런데, 몇 번 보면 금방 이상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블로그로 돈을 잘 버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 방법을 알려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 그 영상들의 구조는, 대부분 비슷하다. 처음엔 무료 강의를 해준다. 무료 전자책도 준다. 진입 장벽을 없애고, 일단 앉혀놓는 것이다. 이걸 강의팔이들은 화투판에 앉힌다고 표현한다. 일단, 몇 편 글을 써 보라고 한다. 애드센스(Adsense) 승인이 날리가 만무하다. 그러면, 슬슬 유료 강의 이야기가 나온다. 블로그 수익보다, 강의 수익이 훨씬 크다 는 걸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콘텐츠를 파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를 만들겠다는 사람의 기대를 파는 것이다. ---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솔직히 말하면, 블로그의 황금기는 이미 지나갔다는 이야기가 많다. 애드센스 승인은 몇 해 전보다 훨씬 까다로워졌고, 승인을 받아도 수익을 내기까지의 길은 길고 좁다. 여기에 AI의 등장이 흐름을 더 빠르게 바꿔놓고 있다. 검색 한 번으로 원하는 정보를 요약해서 받아볼 수 있는 세상에서, 정보성 블로그 글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끝물이라는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 그렇다면, 블로그를 쓰지 말아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처음부터 수익을 목적으로 시작하면 상처를 받기 쉽다 는 것은 분명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애드센스 승인이 늦어지고, 방문자가 오지 않고, 쓴 글이 묻혀버릴 때, 허탈감이 제법 있다. --- 이런 이유로, 블로그는 취미로 하는 것이 좋다. " 수익이 따라오면 좋고, 따라오지 않아도 그만이다 "라는 마음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닿으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수익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

나이에 관하여

이미지
  저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의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그냥, 나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과 너무 개인적인 것에 대한 물음이라는 생각에서, 나이를 절대 묻지 않습니다. --- 상대가 몇 살인지 알게 된다고 해서 그 사람을 더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니고, 모른다고 해서 대화가 어색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저는 그 사람의 본질, 인성, 무엇에 관심을 두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가 훨씬 더 궁금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소수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 나이를 묻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듯 합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도, 어색한 침묵을 메우기 위해서도, 심지어 친해지려는 의도로도 나이를 묻습니다. 모임에 나가면 열 마디가 채 오가기도 전에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숫자 하나로 호칭이 정해지고, 말투가 정해지고, 관계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 물론, 이것이 나름의 질서를 만들어온 것도 사실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일종의 사회적 좌표였습니다. 누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하는지, 누가 술을 따르는지, 밥값은 누가 내는지. 오랫동안 나이는 그 모든 것을 결정하는 기준이었습니다.  그 안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예의 없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시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이는 꽤 사적인 정보입니다. 외국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큰 실례로 여깁니다. 연봉을 묻거나 몸무게를 묻는 것과 비슷한 느낌으로요.  제가 외국에서 교수를 할 때, 나의 나이를 물어본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물론, 저도 안 물어봤구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해왔던 그 질문이, 다른 문화의 눈으로 보면 선을 넘는 일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이를 묻는 것이 왜 당연하지?"...

부부 사이에도 '개인 시간'과 '자기 방'이 필요한 이유

이미지
 어느 날, 아내가 조용히 물었다. " 당신, 가끔 나 없이 혼자 있고 싶지 않아? "  오 귀신인데; 당연히 그렇다. 와이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꺼내기가 어쩐지 미안했다. 오래 함께 산 사람에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면, 마치 그 사람이 싫어진 것처럼 들릴까봐.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삼켰다. 그렇지만, 며칠 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 그러고 보면, 우리는 부부 사이의 '거리'를 다루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살아왔다. 가까울수록 좋은 것, 붙어 있을수록 사이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오랜 세월 몸에 배어 있었다.  젊었을 때는 일과 육아로 바빠서 함께 있는 시간 자체가 귀했으니, 그 생각이 문제가 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독립하고, 은퇴가 가까워지고, 집에서 둘이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히려 더 답답하고, 사소한 것에 짜증이 나고, 말이 줄어드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바라던 시간이었는데, 막상 그 시간이 오자 어색해진 것이다. --- '자기 방'이라는 말이 나오면, 어떤 분들은 쓴웃음을 지을 수도 있다.  평생을 좁은 집에서, 빠듯한 살림으로 버텨온 분들에게 방 하나를 온전히 혼자 쓴다는 말은 사치처럼 들릴 수 있다. 자녀 방, 안방, 거실, 그렇게 나누다 보면 어른들의 '나만의 공간'이란 처음부터 없었던 집도 많다.  그러니 이 글이 공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이야기처럼 들릴까봐, 먼저 이 말을 하고 싶었다. --- 하지만, 내가 말하는 '자기 방'은 꼭 물리적인 방이 아니어도 된다. 아내가 낮잠을 자는 사이 베란다에 나가 혼자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 남편이 뉴스를 보는 동안 부엌 한켠 작은 의자에 앉아 조용히 라디오를 듣는 것, 이른 아침 가족이 일어나기 전 혼자 동네를 한 바퀴 걷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 중요한 것은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그 시...

용돈 주는 자녀와 용돈 받는 부모 사이의 미묘한 심리학

이미지
  돈이 오가는 자리에는, 항상 감정도 함께 따라온다.   이것이, 가족 사이일 때는 더욱 그렇다. 자녀가 내미는 봉투 하나에 부모는 묘한 복잡함을 느낀다. 고맙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존심이 흔들리기도 한다. 이 감정은, 누구나 느끼는 것 같다.  역할이 뒤바뀌는 순간 오랫동안, 부모는 주는 사람이었다.  손을 내밀면, 채워주는 것이 부모의 자리였다. 이 역할이, 어느 날 조용히 뒤집힌다. 자녀가 월급봉투를 받기 시작하고, 명절이 되면 흰 봉투를 건네오는 날이 온다. 받는 순간, 부모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자리를 옮긴다. "내가 이제 받는 쪽이 됐구나." 이 감각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삶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느낌에 가깝다. 누군가에게 기대야 한다는 것, 그것이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 해도, 부모에게는 적응이 필요한 변화다. 자녀 쪽의 마음도 단순하지 않다 자녀라고 해서, 용돈을 건네는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 여기에는 효도하고 싶은 마음, 오래 걱정을 끼쳤다는 미안함, 이제는 내가 뭔가를 해드릴 수 있다는 작은 안도감이 섞여 있다.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의 기대가 끼어들기도 한다. 내가 이만큼 챙기고 있으니 부모님도 내 사정을 알아주셨으면, 너무 서운한 소리는 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 말이다. 말로 꺼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마음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용돈이라는 봉투 안에는, 이렇게 많은 감정이 들어 있다. 부모의 자존심과 감사 사이에서 부모 세대, 평생을 스스로 벌고 쓰며 살아온 분들에게 자녀의 용돈은 감사함과 동시에 미묘한 불편함을 준다. 받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괜찮다, 됐다"며 손사래를 치는 것도, 사실은 감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받아야 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 거절 안에 자존심이 있고, 이 자존심 안에 긴 세월이 있다. 자녀가 이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지만, 알아달라고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

가치있는 삶이란?

이미지
어느 날 문득, 오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하였다.   짧은 통화였지만, 끊고 나서 한참 동안 따뜻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저 사람은 참 잘 살고 있구나.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그 작은 마음 씀씀이 하나로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젊었을 때는 꽤 크게 생각했다.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고.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 기준이 별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려한 성취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가느냐 가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맡은 일에 충실하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사실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닌, '이 일에 내 마음을 두는 것이면 된다'라는 생각 으로 살아온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시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한 일에 대하여 내 자신이 만족한다면, 그러면 된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누가 보던 보지 않던, 이것이 내 역할이라는 생각으로 임하는 것. 이 태도 안에, 내 삶의 의미와 무게가 담겨 있다. --- 그러고 보면, 주위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도 거창한 데서 나오지 않는다. 길을 걷다 무거운 짐을 든 이웃에게 문을 잡아주는 일, 힘들어 보이는 후배에게 밥 한 끼 먹자고 건네는 말, 오래 연락 못 했던 친구에게 문자 한 줄 보내는 것.  이런 작은 행동들이 쌓여서 관계가 되고, 관계가 쌓여서 삶이 된다 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이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삶도 누군가에게 작은 온기가 된다는 것을 느낀다. --- 나는, 여전히 가치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오늘 하루, 내가 맡은 자리에서 성실하고 주위를 한 번 더 돌아볼 수 있다면,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당신이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같이 보면 좋은 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