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프니, 많은 것이 보인다
감기에 걸렸다.
처음 이틀은 그냥 버텼다. 이 정도쯤이야 하면서. 웬만한 건 견딘다라고, 살아왔다. 젊었을 때부터 그랬다. 몸이 좀 안 좋아도 강의는 강의대로 했고, 논문은 논문대로 썻다. 아프다고 티 내는 건, 좀 모자란 것 같이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사흘째 되던 날 강의실에 들어서면서, 조금 다르다는 걸 느꼈다.
보통의 나는, 강의 전에 이미 준비가 되어 있다. 교재를 펼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는 이미 오늘 수업의 흐름이 돌아가고 있고, 이 중요한 부분을 어떻게 쉽게 전달할 수 있을가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30년 넘게 해온 일이라, 몸이 먼저 반응한다고 해야 할까. 강의실에 들어서면,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그날은 그게 없었다.
수업에 들어갔는데, 평소의 그 감각이 올라오지 않았다. 몸이 무거우니 생각도 무거웠다. 준비해온 내용은 머릿속에 있었지만, 그것을 살아있게 만드는 무언가가 빠진 느낌이었다. 열기랄까, 흥이랄까. 살아 있는 강의의 느낌이, 없음을 스스로 느끼었다. 강의를 오래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아는 것과 전달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는 걸.
그날 나는 전자만 했다. 후자는 잘 안 됐다.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이 나가는 걸 보면서, 마음이 안 좋았다. 이 수업은 저 많은 학생들의 소중한 시간인데, 저 친구들이 무엇을 가져갔을까?하는 생각에 슬펐다. 강의는 인생의 일부이다. 그렇지만, 내 직업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강의라는 게 내용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교수가 그 내용을 얼마나 살아있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같은 말도 다르게 들린다. 학생들은 내용을 듣기도 하지만, 그 내용을 전하는 사람의 온도를 함께 느낀다. 그 온도가 그날은 평소보다 많이 낮았다.
강의실을 나서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미안하다고.
학생들한테 직접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혼자, 복도를 걸으면서. 오늘 제대로 못 해줬다는 그 생각이, 오래 남았다.
집에 돌아와니, 몸이 진짜로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아내는 성당에 가있었고, 밥은 없었다. 약간 짜증이 났지만, 아내의 삶을 존중해야하고 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만나러 간 아내에게 무어라 할 수는 없다. 왜냐면, 나는 지옥에 가기 싫다. 배달을 시켰다. 이렇게 쉽게 시켜먹을 수 있는, 우리나라에 감사했다.
할일을 제껴놓고, 그냥 누웠다.
90년대에 강남에서 학원강사를 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어떻게 하면, 쉽게 재밌게 가르칠 수 있을가? 항상 이 생각뿐이었다. 2류는 '무엇을 가르칠가'에 중점을 두고, 1류는 '어떻게 가르칠가'에 중점을 둔다. 이것이, 그 당시의 학원가의 유명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번 돈으로, 생활도 했고 대학원 등록금도 내었다.
오늘 강의는 2류였다.
몸이 아프면, 열정도 줄어드는 것 같다. 또, 그럴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어른들이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말의 의미를, 다시 느낀 하루였다.
며칠 쉬면, 나아질 것이다. 따뜻한 커피를 몇 잔 마셨고, 아내한테 고맙다는 말도 했다. 평소엔 당연하게 받아오던 것들인데, 몸이 안 좋으니 고마운 게 보였다.
예전에 은퇴하신 선배가, 하시던 말씀이 기억이 난다. 개학할 때가 되었는데, 선배가 나한테 '학생들 볼 생각에 설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때, 나는 이 선배가 '돌았구나'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다음 주 강의가 기다려진다. 나도, 같이 미쳐가는 것 같다.
몸이 아프니, 많은 것이 보인다. 평소에 얼마나 많은 걸 몸에 기대고 살았는지. 그리고 그 몸이 버텨주는 동안, 좀 더 충실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감기 한 번에,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 같이 보면 좋은 글들
1. 매일 아침 나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 소리(오디오)로 듣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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